감수성폭발/이어지는망상

고스트헌트/ 진짜누가얘좀살려줘

사용할수없는네임들 2015. 11. 17. 12:11

[간절히 이 사람을 누군가 살려주기를 바라며/ 고스트헌트/ 진마이/단편/ 꿈의 인사]

 

 

ㅡ혼자서도, 사랑은 할 수 있다. 


그는 갔다. 돌아갔다. 자신이 응당 있어야 할 머나먼 곳으로 훌쩍 떠났다. 제 동생의 이름과 얼굴로 주구장창 마이의 앞에 나타나 지도령행세를 했던 그는 최후의 최후까지도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지 못한 채 사라져버렸다. 그와 동시에 다사다난했던 마이의 첫사랑은 끝났다. 사라진 사람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으로 펑펑 울었다. 평소답지않게 너그러워진 소장이 그 곁에 있어주었지만, 진실을 깨닫고 나자 그저 사라진 사람에 대한 마음만 사무치게 할뿐,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했다. 다른사람은 다른사람일 뿐이라는 사실만 시리도록 알 수 있었다. 


동시에 그녀의 외로운 짝사랑이 시작되었다. 신기하게도 얼마 없는 추억만으로도 사람은 살아갈 수 있었다. 꿈속에서 일어났던 짧은 순간들을 추억하면서 소장이 선심쓰듯 '버린' 사진을 간혹 꺼내어보면서 하루하루 조금씩 가슴에 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눈에 박힌 그 아름답던 선한 미소까지는 어찌하지 못 했는지 시시때때로 멍하니 밤하늘을 바라본다던가 같은얼굴을 한 쌍둥이동생인 소장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다던가하는 일들이 사무실에 찾아온 손님들에게 보이곤 했다. 

3년이 지났다. 

그 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만 결국 진을 발견하기 전과 별 다를일이 없었다. 볼일이 없어 영국으로 돌아갔던 소장은 새로운 자료를 찾는다며 다시 일본으로 날아와 SPR사무실을 차렸다. 대학에 진학한 마이는 다시 그 사무실에 조수보조로 채용되었다. 계속 드문드문 연락되던 스님, 무녀, 엑소시스트신부도 자주 찾아오게 되었다. 특별히 더 자주 보게 된 것은 영능력자 하라 마사코였는데 소장이 돌아왔다는 얘기를 듣고 바라는 바 있어 이런저런 기회를 엿보고 있다. 그 인간답지않은 매정한 소장을 알고도 노력하는 미모의 귀여운 여자아이가 너무 안타깝고 대단해서 마이는 슬쩍슬쩍 마사코의 일을 도와주곤 한다. 


마이는 잠시 최근의 생활을 떠올려보다가 침대 옆 탁자에 올려둔 액자를 집어 들었다. 소중히 간직한 사진 한 장안의 두 사람이 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얼굴만 봐도 구분할 수 있을것만 같았다. 자기 전에 보고 잔 것은 꿈에 나올 확률이 높다는 걸 듣고서 시작해서 이젠 마치 잠들기 전 의식처럼 하는 행동이었다. 작게 미소지은 그녀의 손이 스탠드를 껐다. 

그리고 꿈을 꿨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마이는 SPR식구들과 알게 된 후로 의미 없는 꿈을 꾼 적이 없었다. 언제나 그녀가 꾸는 꿈은, 그가 의도한 꿈이었다. 입이 말라와서 침을 삼켰다. 사위가 조용했다. 조용한 가운데 그녀의 심장소리만 들렸다. 온통 검은색 투성이었지만, 그래서 더욱 마이는 부풀어 오르는 가슴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진?"

 

길다. 기다리는 1초가 너무 길다. 무거운 정적에 쫓겨 그의 이름을 부른다. 이 정적을, 무게를, 심장박동을 참을 수가 없었다.

 

"진, 진?"

 

검은 어둠의 장막 너머로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는 것 같았다. 마이는 그 형태에 집중했다. 익숙한 형체였다. 다행히도.

 

"-오랜만이야, 마이."

 

어쩐지 조금 쑥쓰러워하는 듯이 어색하게 짓는 미소가 눈 앞에 어른거린다. 그 어색한 웃음에 마이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다짜고짜 애칭을 그렇게 애절하게 불렀다. 돌아온 이성이 하는 소리에 눈이 핑글 돌고 정신이 훅 날아가는 듯 했다.

 

"으아아아니 저기 그게 그러니까아- 나도 반가워!!!!!"

 

정확한 마음을 깨닫고 난 뒤 처음이다. 몇 년간 홀로 키워온 마음이다. 마이는 혼자 폭주하는 스스로를 통제할 수가 없는 상황에 빠졌다. 뭔가 말을 해 보려 하지만 제대로 된 문장으로 끝나는 말이 없다.

 

"-결국, 알아버렸네."

"응? 뭐를?"

"내 이름."

"아- 나르가 가르쳐 줬어-!"

 

기운 없는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유진때문에, 마이는 조용히 그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마이의 폭주는 사랑의 힘으로 순식간에 멈추었다. 검은 공간에 그의 목소리만 조용히 울려 퍼졌다.

 

"그렇구나, 음, 반가워. 유진 데이비스야."

"어, 음... 타니야마 마이입니다. 잘 부탁드립.."

악수.

 

아직 완전히 정신이 돌아온 건 아니어서, 마이는 그가 하자는 대로 속수무책으로 끌려다니고 있다. 평소와 달리 여유롭고 느긋하게 그가 손을 내밀었고 마이는 아무 생각 없이 멍한 머리로 손을 맞잡았다. 마치 처음 만나는 모양새가 되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누구누구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나는 누구누구에요'. 

 

마이는 문득 이전의 그가 나타난 꿈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특별한 의뢰가 없는데도 그가 꿈에 나왔다. 마이의 마음에 하늘도 감동한 것일까.

 

"진이라고 불러줘. 마이."

 

짧은 말을 마치고서 진은 하얗게 웃었다.

마이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그 웃음이었다.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듯 했다. 마이는 그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지지만, 뇌는 이미 과부하 상태. 그저 눈을 뜨고 있는 것이 전부다.

 

"잠깐만- 진!!! "

 

그리고 그가 점점 흐릿해지는 것을 인식했다. 마치 사라지기 직전 꿈에 나왔던 것 처럼, 서서히 윤곽이 흐려지고 있었다. 한 건 여상스러운 인사뿐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훨씬. 마이는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

 

유진의 목소리가 흐릿해서 들리지 않았다.  서서히 사라지는 얼굴의 입모양으로 간신히 하려는 말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서 어렴풋이 알람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