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물을 머금은 붓이 거친 종이위를 부드럽게 스쳤다.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났다. 붓은 길게 한 번 획을 긋고는 거북조각으로 장식된 화려한 벼루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아직 해가 다 지지 않은 오후, 햇살이 벼루 위로 부드럽게 내리쬐고 있었다. 소경예는 수묵화처럼 그 시간에 박제되어 있었다. 성지에 침입한 기분이 든 듯한 시간도 잠시, 눈썹이 이내 찌푸려졌다. 언예진은 막 문을 열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문은 드르륵 큰 소리를 내면서 열어젖혀졌다. 그림이 살아 숨쉬었다. 그래, 이래야지. 언예진은 부러 더 활짝 웃었다.

"소공자! 여기서 무엇 하시오! 이렇게 맑은 날에!"

언제나 그렇듯 팔랑팔랑 목소리가 방 안을 날아다녔다. 열린 문 틈으로 산들바람이 들어왔다. 소경예는 창을 보던 고개를 돌려 답했다.

"오시었소."

경예가 단정한 얼굴에 그늘이 진 채로 애써 담담히 웃음을 띄웠다. 예진의 눈썹이 다시 쭈글쭈글해졌다. 경예는 항상 그랬다. 어떤 고통도 그저 받아들이고, 불우한 과거도 그저 짊어질 뿐, 부처가 있다면 그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예진은 그 단단해 보이는 얼굴 뒤의 보이지 않는 눈물이 걱정되었다. 선비같이 생긴 얼굴을 하고서도 경예는 타고난 무인이었다. 검을 만지는 것이 생이고 움직이는 것이 삶인 사람이 어느새 문갑과 혼연일체가 되어 있다. 다른 사람은 잡아내지 못해도, 그의 가장 절친한 친우라고 자부하는 예진은 알 수 있었다. 경예는 처음 겪는 모든 것으로 가득한 장소에서 자신이 가장 편할 수 있는 자유를 박탈당했다. 높은 사람과 혈연이 있다고 밝혀진, 사생아. 양나라에서 경예는 언제나 그 자신보다 그 꼬리표를 통해서 먼저 판단당했다. 경예는 스스로 하고싶은 일을 하기 전에 반드시 한번 더 생각해야만 하는 자리에 올라야 했다. 검 한번 마음껏 쓰지 못하는 환경에서 경예는 온 몸이 근질거리다 못해 돌이 될 지경일 것이다.

"오늘 밖을 보니 꽃이 피어 아름답더이다. 나갈 생각 없소?! 내 보기 좋은 장소로 안내하지!"

예진은 목소리에 억양을 넣었다. 다소 우스꽝스러울만큼 부풀려진 어투는 예진과 썩 잘 어울렸다. 눈썹이 들리고 눈이 댕그랗게 커져서는 손을 휘휘 저었다. 크게 벌어진 입을 보면 정말 오늘 날씨가 너무 좋아서 행복한 것 같았다. 경예는 소리 없이 눈을 휘고는 무릎을 짚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 좋은 장소가 아니면 책임지실거요?"

돌부처에 가까운 경예가 던진 가벼운 농담에 웃음이 섞여들어갔다.

"흥, 그럴 일은 없을거요! "

방을 나가는 경예 뒤를 예진이 졸졸 따라가며 치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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