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서 인용되고는 하는 저 한 문장. 드라마 킬미힐미에서도 나와서 그런지 아는 사람이 좀 더 많아진 것 같다. 나는 그 이전에 어느 책에서 봤는데 어쩐지 그 짧은 문장이 기억에 남았다. 힘든 순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서부턴가 생겨나는 인간의 의지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가장 힘들어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때를 아슬아슬하게 지나친 순간에, 세상은 거지같고, 나는 약하고, 모든 살아가는 것이 힘들게 느껴질 때 어디선가 본 이 구절이 내 안의 숨어있던 의지를 깨웠다. 이 구절은 원래는 폴 발레리라는 프랑스 시인의 아주 긴 신에서 한 줄이라고 한다. 너무 길어서 따로 글을 하나 더 파서 올렸다 ㅎㅎ

 

1. 폴 발레리- 해변의 묘지

원본을 찾아보자 내 생각과는 달리 이 시는 좀 더 거칠고 강렬한 느낌이었다. 이 시를 읽고 있으면, 해변에서 뜨지 않는 태양을 기다리며 바닷바람을 맞고 있어야만 할 것 같다. 정면으로 솟구치는 바람에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바다 멀리 수평선에 꽂아두어야 할 것 같다. 마침내 새벽을 기다리며, 밤의 종언을 고하고 태양을 끌어내야만 할 것 같다. 모든 시련이 오히려 기꺼운 이 하나의 존재는 숫제 영웅과 닮았다. 속에서 불타오르는 열정을 쏟아부을 곳을 마침내 찾은 이, 흰 말을 타고 관을 쓰고 광야에 나타날 것만 같은 초인. 이 시는 굳이 말하자면 이육사의 광야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 겠다'로 번역되는 구절은 사실 영어로 하면 The wind is rising! we must try to live! 라고 한다. 직역하자면, '바람이 솟구친다! 우리는 살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정도가 아닐까. 조금 더 의역하자면 '바람아 와라!! 나는 살아 갈 것이다!!' 까지도 가능할 것 같다 ㅎㅎ 마침표들이 느낌표로 읽힐 정도로 강렬한 어투다. 바람이 불고, 세상은 거칠고, 파도는 몰아치고, 내 생의 페이지는 술렁술렁 넘어가 버리는 이 때, 나는 살아야한다! 숨을 끊지 못해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아둥바둥 온 힘을 다해서 정말로 '살아'가겠다! 왜냐하면 나는, 살아가야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내 속에서 부터 그냥 올라오는 그 생에의 의지가 나에게 명령하기 때문에. NO라는 말을 허용하지조차 않는, 의무에 가까울 정도로 절대적인 의지가 솟아난다는 것을 Must로 나타낸 것이 아닐까 한다.

문득, 이 오묘한 의지로부터 나는 고등학교 때 훑듯이 배웠던 생철학과 실존주의에 대해 떠올렸다. 그 당시에는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던 활자였다. 서양의 이성주의에 대항하여 비이성 비합리를 주장하고 결국 인간에게 남은것은 의지와 삶이다라고 주장했던 그 학자들은 그 학문의 특수성 때문에 특히 이성적으로 배우기는 참 힘들다. 오히려 그쪽 학문을 공부하면 우울증으로 가기 쉽다고 한다. '세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썩었지만 우리에게 단 하나 있는 것은 생'이라고 말하는 그 문장에서 '세상은 쓰레기야'라고 주장하는 부분은 이성적이고 '그러나 우리에게 생이 있다'는 부분은 의지적이기 때문이다. 지금 나의 짧은 생각으로는, 그 학자들의 생각은 공부해야 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냥, 갑자기, 어느날 비 합리적인 깨달음이 찾아와야 하는 것 같다. 이 시와 같은 어떠한 의지에 이르는 과정이 그 생철학이 추구한 사람인 것이 아닌가 짐작해본다. 철학은 인간 삶에 대한 생각인 것이다. 이성과 논리가 의미없는 가장 민낯의 인간에 대한 생각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과거에 이해를 못했던 키에르케고르나 쇼펜하우어, 니체의 해석본을 한번 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다시 보면 지금은 뭔가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이성적으로 그들의 생각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공감할 수 있는 건 아닐까? 지금 내가 죽음에 이르는 병에 대하여 경계하는 이 순간에, 나는 의외로 가장 준비되어 있는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사실 나는 직관적으로 '살아야 한다'로 번역된 이 must가 감동적으로 와 닿지 않는다. 자발적인 의지라는 기분이 별로 들지 않는다. 마치 외부에서 주어진 의무로 인해 내가 어쩔 수 없이 살아야만 한다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래서 사실 나는 어떠한 의지를 나타내는 '겠다'가 더 자발적이고 의지적인 느낌이라서 더 좋다. 나는 '바람이 분다, 살아야 겠다'가 더 마음에 든다. 더 마음에 와 닿는다.

 

2. 남진우- 로트레아몽 백작의 방황과 좌절에 관한 일곱 개의 노트 혹은 절망 연습 中 7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야겠다
  

20세기 말 한국에서 시인이 짤막하게 던진 메모. 굉장히 한국적인 정서가 흘러넘친다. 바람이 불어도, 불지 않아도, 살아야겠다고 말하는 저 사람에게서는 버티고자 하는 생의 의지가 읽힌다. 앞선 폴 발레리에서 이육사를 읽어냈다면, 여기서는 윤동주가 읽힌다. 세상은 힘들고 거칠고, 언제나 모든 것을 무너뜨리려 하지만, 무너지지 않겠다는 의지. 어떻게 해서든 꾸역꾸역 살아내겠다는 의지다. 상상해보자. 갈대 숲에 들어갔다. 드넓은 갈대로 이루어진 들판에는 나 홀로 서 있을 따름이고, 갈대는 바람이 부는 대로 여기로 저기로 술렁인다. 바람의 존재는 너무나 확실하다. 눈에 보일 뿐 아니라 촉감으로 닿고, 숨으로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그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다짐하는 것이다. 살아야겠다고. 어떻게든 살아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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