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기형도

 

그는 어디로 갔을 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를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뭔가 이 체념한듯한 덤덤한 목소리가 좋다. 이미 여기저기 마모되어 버석한 눈동자도, 이미 다 알아버린 어색한 목소리도 좋다. 예전에 누군가에게 기형도 시인이 좋다고 했을 때에 그 사람이 지었던 표정이 생각난다. 정말 신기한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쩌겠어, 난 좋은걸.

특히 이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는 나름의 인생 시였다. 고등학교 때 처음 접했었는데 이유도 알 수 없이 너무 깊게 남았더랬다. 특히 그 '중얼거림'이 인상적이어서 패러디를 한 적이 있었는데 아주 또라이같은 글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도서관을 거닐다가 예전 기억이 떠올라 기형도를 찾았다. 원래도 많지 않은 시집이지만 자리가 너무 헐빈해서 어쩐지 아쉬웠다. 그래서 손이 갔다. 단 한 권, 시집을 출판한 비운의 시인 기형도. 그의 시를 좋아했지만 시집을 본 적이 없어서 이 기회에 한 번 죽 봐야겠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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