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기대와 그에 대한 실망, 누구도 나를 이해할 수 없고, 나는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다는 체념. 어제도 그렇다. 외롭고 허무하다. 여태 모든걸 담아두기만 해서 속으로 너무 곪았었다. 그래서 털어 놓으면 뭔가 편안해질줄로만 알았다. 뭔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고 많은 것들이 변할 거라고 생각했다. 조금 더 세상은 장밋빛일 거라고 생각했고, 나는 조금 다른 형태의 삶을 살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아주 이전의 아무 상처도 없던 때로 돌아갈 수가 있는 게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연관성 있는 사건이 터지면, 나에게 비슷한 의미가 있는 에피소드가 있는 일이 일어나면 둑이 터지는 것처럼 모든 게 쏟아진다.

 

다 나은 줄 알았더니, 다 나은게 아니었다. 그냥 내가 점점 거리를 두려고 노력한 탓에 트리거가 작동하지 않은 것 뿐이었다. 혹은 내가 부들부들 떨면서 온 갖 난리를 친지 얼마 되지 않아 알아서 몸을 사린 탓인지도 모른다. 내가 이제 나았나보다 생각할 정도로 멀쩡해져서인지,시간이 지나서인지, 나에게 더 관심이 없고 나와 현재 함께 살지조차 않는 그는 당연히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반성하는 척 했던 것을 끝내버렸다. 정말 중요한 시간인데, 정말 시간이 부족한데, 정말 안그래도 행복한 일 한점 없는 나날들인데, 또 이렇게 되고 말았다.

 

어떻게 보면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어떤 대단히 무신경한 하나의 에피소드가 발생하자마자, 온갖 억울함과 실망감과 속상함같은 분노를 닮은 감정들이 몰아친다. 무의식적으로 내 편일 거라고 생각하고, 무의식적으로 나에 대해 많은 것들을 기억할 거라고 생각했던 나를 탓하면서도 쉽게 기대를 저버리지 못해서 슬퍼했다. 이토록 오랜시간동안 내가 주기적으로 필요하다고 어필 했던 모든것들이 언제나 무시되고 있다는 걸 깨달아 슬퍼했다. 억지로 나를 끌어다가 자기가 해 주고싶은대로 해 주면서 내가 그걸 필요로 하는지는 신경도 쓰지 않고 요구하지 않는 나를 타박했던 것들이 너무 짜증이 났다. 온갖 감정이 휘몰아쳐 억누르려고 애쓰는 와중에 뜬금없이, 새롭다는 듯이, "화가 났구나,"라고 하는 것도 어이가 없었다. 화가 날 줄 몰랐다는 듯한 그 태연한 목소리가 화가 났다. 내가 가진 감정이 화라고 단순하게 표현하기 어려워서 더 화가 났다. 내가 가진 수 많은 슬픔과 실망감과 체념과 억울함이 단순하게, 화, 라고 표현된다는 게 용납하기 어려웠다. 기어이 참지 못해 하루가 끝날 무렵 전화를 걸어 다 토해내고 말았다. 멀뚱멀뚱 이해하지 못해 그저 자기 변명만 일삼는 모습에 더 상처받았다. 나는 이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어떤 방식으로 상처받고 어떻게 표현해서 어떻게 노력하더라도 전혀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구나. 내가 원해서 태어난것도 내가 가정을 지정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멋대로 관계를 단절하지도 못하는 이 관계속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도리 없이 그저 상처만 받아야 하는구나.

 

맞다 어쨌든 말하면 들어 주기는 하고, 나를 위한다는 생각을 하기는 하고, 본인을 희생해 내게 뭔가 해주려고 하기는 하고, 물질적인 지원을 하기 위해 노력 하기는 하고, 심한 말이나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는다. 사실 나는 어쩌면 복받은 아이고, 내가 이토록 괴로워 하는 건 나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과 관계 없이, 좀 나에게 집중하고 싶다. 가족에 대한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나, 사람을 온전히 믿고 기댈 수 없어진 나, 나를 사랑하는 게 너무 어려워 몇년 째 나를 사랑하려고 몸부림 쳐야 하는 나, 친구들이 집에 가고 싶다고 할 때 공감하지 못하는 나, 공적인 직무에 모든 것을 던지지도 못하게 되어버렸는데, 내 삶과 가정에 집중하기도 어려워진 나, 애정결핍에 몸서리치면서 사람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나. 어딘가 망가진 것 같지만 어떻게든 주워보려고 혼자 몸부림 치는 내가 슬퍼서 조금 더 소리를 쳐 본다.

 

그나마 다행인건 진로고민은 조금 해결이 되어서, 어떻게 해서든 내가 무엇을 미래에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모든 걸 잃어버려서 혼자가 되어버리더라도 나에게 남아있는 게 있어서 다행이다. 내가 여태 나마저 포기하면서 쌓아온 수 많은 성적과 과거의 공부한 것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뭐라도 해놔서 너무 다행이다. 내가 마지막에 가진 어떠한 가치가 있다는 게 너무 다행이다. 꾸준히 내가 나아질 명백한 길이 있어서 다행이다. 어쨌든 나라도 노력하면 뭔가 상황이 달라지고 나아지는 게 다행이다.

 

물론 사람은 혼자 살수 없고, 나는 특히나 타인과 관계 없는 데에서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래도 더 혼자서도 버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최근 2년의 일로 느낀 것은, 사람들은 저마다 굉장히 여유가 없어서 다른 사람의 슬픔과 분노를 들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특히나 특별히 객관적으로 큰 일이 있는 게 아니라면 더욱 그렇다. 쉽게 지치고, 가벼운 것을 요구한다. 나의 고통이나 번민을 함께 짊어질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함께 짊어지고자 하다가 관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러니까 결국 삶은 혼자 사는 것이다. 스스로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하고, 타인과는 누가봐도 소소한 이야기들을 소소하게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다. 그냥 외로우니까 누구라도 만나서 관계라도 유지하고 싶으니까, 남들이 즐길 수 있는 이야길 하는 것이다. 여태 타인의 짐을 함께 짊어지려고 애썼던 내가 그냥 호구였던 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역시 중요한 건 내가 아니겠나.

 

같이 짐을 짊어져주지도 못하면서 힘든 나에게 자신에게 맞춰 놀아달라는 이기적인 사람은 멀리해야지. 나와 비슷한 패턴을 가지고 나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만 만나야지. 괜히 누가 멀어지는 걸 두려워하거나, 주변에 사람에 없어지는 걸 걱정하지 말아야지. 혼자서도 부지런히 열심히 살아야지. 혼자서도 버틸 수 있는 강한 사람이 되어야지. 정말, 혼자서도 어떤 자극에도 무너지지 않는 강한 사람이 되어야지. 타인 의존도를 조금 낮추고 조금 더 단단한 바위가 되어야겠다. 내 의지를 굳건히 하고, 누가 뭐라고 하든지 나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확실히 해야지. 누군가를 내가 도와주는 건 의무가 아니라는 걸 생각해야지. 누군가가 내 앞에서 슬퍼하고 실망하더라도 나만 생각해야지. 겉으로 가볍게 해 줄 수 있는 걸 가볍고 쉽게 제공함으로서 욕을 먹지 않는 현명한 사람이 되어야지.

 

정말, 강인하고 현명한 사람이 되어야지.

많은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사회에서, 나를 지킬 수 있는 현명한 사람이 될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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