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의 누구였나가 분노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했다는 걸 과거에 읽은 적이있다. 철학통조림이었나. 그땐 별 생각이 없었다. 흠 맞는 소리군 정도.

그런데 최근 분노의 소중함이 너무 와닿는다. 생각해보면 과거의 나는 완전히 양보함으로써 갈등을 원천차단하며 살았다. 나는 내가 갈등을 일으키는 것도,  그걸 통해 누군가를 변화시키기 위해 설득하는 것도, 어느지점에서 분노해야 할지 결정하는 것도 너무 싫었던 것같다. 그에 더해 묘하게 이해심이 넓고 화내는 것은 나쁜 것이라는 출처를 알수없는 대단히 성스러운 윤리관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감정을 느끼는 인간이어서, 내가 타인의 행동을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나의 여린(?) 마음은 상처입었다. 그대로 넘기는 진정 대범한 성자였다면 이 이야기는 에버 해피 애프터였겠으나, 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 탓에 크고 작은 앙금이 나도 모르게 쌓여서 어느 순간 뇌를 정지시키고 튀어나가 관계와 내 이미지를 완전히 부서트리곤 했다.

이 행동의 문제는 그 후에 있다. 나는 결국 좁은 세상에서 살기 때문에, 연결이 끊기지 않은 누군가는 나의 그런 추한모습을 기억하고, 혹은 기억한다고 내가 생각한다. 종종 멍하니 앉아 있으면 나는 좀 더 현명하고 꼴사납지 않은 방식으로 대처하지 못한 나를 자책한다. 그정도까지 갔으면 그는 감정이 터지지 않았더라도 다시 안 볼 사람이므로 끊어진 관계가 아쉽지는 않다. 다만, 극한으로 치닫는 과정에서 내가 목격한 나의 모습이 아쉬운 것이다.

그래서 뭔가 더 나아지고자 고민을 해 봤다. 어떻게 해야하는가? 답은 세련된 분노였다. 세련된이라는 의미는 끝까지 이성을 잃지 않고 부드럽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이성을 잃기 전에 적당한 시점에 다단계로 분노해야 한다. 정확하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말을 전해야 한다.

그리고 어려움을 발견했다. 대체 어떤 포인트에서 분노해야 하는걸까? 어느 지점이 적절한 수준인가? 어떤 이유로 분노해야 하는가?

연이어 생각한다. 이것은 결국 어느 지점에서 나는 가드를 올려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이다. 사소한 사건들이 내 마음에 얼마나 파문을 일으키는지는 알기 어렵다. 매번 달라지는 영향력을 정리하는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알수없는 이유로 매번 분노하기도 하고 그 무엇도 의미 없는 것처럼 무던하기도 하다.

그냥 부끄럽지않은 성숙한 사람이 되고 싶을 뿐인데 너무 어렵다. 어른은 대체 언제 될 수 있는거지? 예민충과 폭발범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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