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져 내렸던 조각들이 서서히 형체를 이루고 있는 것 같다. 가끔은 지난 몇 년이 나에게는 증발한 것만 같아서 개인적인 나의 성숙도, 외적인 커리어도 5년은 늦된 느낌에 불안하지만 아무튼 나는 3년 전 보다 재작년에 무언가 변화하고 성장했으며, 재작년보다는 작년에 더 많이 성숙했다. 슬슬 주변에서 너는 네 나이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푸시가 들어오지만 밖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안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어쨌거나 나는 나아가고 있다. 과거가 들이닥쳐도 뿌리치고 현재에 집중하면서 조금씩 더 후회 없는 하루를 살고 싶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작년을 되돌아보며 새해 첫 달 할 일을 찾았다. 바로, 현실적인 루틴 세우기다. 

 

사실 필요성은 재작년부터 알고 있었다. 사회에서는 아무도 나를 책임져 주지 않으므로 되는대로 살다간 정말 난데없이 이상한 곳에 도착하는 미아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목표를 가지고 힘있게 내 삶을 이끌어가고자 했다. 작년에는 그 것을 위해서는 매시간 매분 고민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루틴을 세우면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이 깨달음들로 시도한 많은 것들은 불발되고 말았다. 분명히 나에게는 물리적인 시간이 있었고 할 수 있는 정도로 짠 계획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계획을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번 주도 할 일이 있었다. 사실은 지난 주 부터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일이고, 꽤 중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 오늘이 됐다. 스스로를 자책하다 오늘 불현듯 깨달았다. 계획이 너무 비현실적이었구나. 

 

원래도 아주 어릴 적부터 상상하길 좋아했던 나는 계획하는 걸 좋아했다. 현실은 지루하고, 힘들지만 계획은 빠르고 순차적인 계획을 세우면 그 순간 나는 모든 것들을 이룬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 아드레날린 팡팡 터지는 순간 가장 좋은 컨디션으로 인정사정없이 세운 계획은 따라서 비현실적인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이 나이 이 업종에서는 내가 예상하지 못하는 것들이 수시로 터져서 당장 다음주에 내가 어떻게 살 지도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 탓에 데일리 계획은 정도가 덜하지만, 계획 범위가 월 단위만 넘어버려도 이게 현실화를 위한 계획인지, 하고싶은 걸 죄다 나열해둔 상상의 산물인지 구분이 어려워져 버린다. 

 

그래서 이번 새해 목표를 세울 때에는 나를 좀 더 잘 알고 나에게 맞춘 현실적인 계획을 세워보려고 하고 있다. 일상에 지쳐도 내가 해낼 수 있도록. 내가 하고 싶은 일과 하기 싫은 일의 비율을 조정하고 내가 팔팔할 때와 지쳐있을 때 할 일을 매칭하고 중간중간 쉬는 시간도 많이 넣을 거다. 인생이 재미 없어 창작물을 헤매지 않도록 현실에서 기대할 만할 일을 만들거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나에게는 필요한 일들을 위한 시간도 따로 떼 둬야지. 벌써 새해가 되고도 일주일 넘게 지났지만 다급해하지 않고 차근차근 나를 좀 더 파악하고 환경을 조정해 봐야겠다. 

 

올 해는 내가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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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오만했다. 특별히 남들을 따라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타인의 취향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타인과 다른 '나'를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과연 세상은 내가 모르는 것들로 가득하고, 편견은 무섭고,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 남들이 다 챙기는 기념일의 들뜬 분위기는 늘 따스하고 거기에 편승하는 것만으로 나는 간단히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모두가 관심을 가지는 행사는 풍요롭고, 절차와 내용들이 대개 정해져있어 특별히 힘들여 고민하지 않아도 손쉽게 빠져들 수 있다. 

 

나 하나만 책임지는 것만 해도 생각보다 무겁다. 나이가 차 생업에 종사하다보니 일을 하고 돈을 버는 것만으로도 일상의 대부분이 채워져버린다. 기념일을 챙기고 특별한 하루를 만들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일상 속 여유만으로는 부족한 경우가 왕왕 있다. 그래서 더 효율적으로 시간을 덜 쓰고 더 많이 즐거워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다른 사람들을 레퍼런스로 잡아 템플릿을 복사해 오는 것이다. 

 

그냥 그렇게 되는 것이다. 특별히 남들이 다 하는 걸 하고 싶다기 보다는, 그냥 그렇게 되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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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집에 놀러와서 하루 자고 갔다. 대 여섯평짜리 작은 방에서 복작복작 보낸 짧은 시간에서 친구가 가장 놀란 점은 나는 넷플릭스 아이디도 없고 우리집에는 티비도 없다는 점이었다.

 

'너네 집에는 티비 없어? 너 영상 안봐? 밥 먹을 때 뭐 안 틀어놔?'

 

걔는 밥 먹을 때 꼭 티비를 켜 둔 댔다. 소리가 없는 게 싫은 것 같았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걸까? 생각해보면 우리 엄마도 집에 혼자 있을 때는 티비를 많이 켜 두신다고 했다. 적막한 집이 싫어서 사람 목소리가 들리는 티비를 보지 않아도 틀어둔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라디오처럼 쓰는 것이다. 밥 먹을 때 그럼 아무 것도 안 보고 그냥 먹냐면서 화들짝 놀라는 친구의 말을 듣고 나를 돌이켜 봤다. 

 

그러고 보니 나는 말이 나오는 영상을 켜 두고 다른 일을 해 본적이 없다. 어쩌면 가정 분위기가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어린 시절 우리집에서는 밥 먹을 때는 꼭 하던 걸 다 멈추고 식탁에 모여서 먹어야 했다. 보던 영상에서 관심이 떨어지면 꼭 영상을 껐다. 노래도 켜 두지 않았고 가족들은 말을 많이 하는 부류도 아니었다. 대개 집은 조용한 편이었다. 내가 좀 자극에 예민한 편이라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일 하나에 엄청나게 몰두해 있을 때가 아니면 어디선가 들리는 소리-특히 목소리-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래서 가끔 노래는 틀어두곤 하는데, 그것도 대부분 가사 없는 재즈 플레이리스트나 ASMR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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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툼이 싫다. 누군가와 싸우는 게 별로다. 그다지 경쟁하고 싶지 않다. 내가 순하고 평화롭기 때문인 게 아니다. 온갖 다툼의 상황에서 진심으로 눈이 뒤집어지는 내가 싫어서다. 그냥 일반인인 내 생각으로는 조금 우스울지 모르겠지만, 나는 가급적이면 선비로 살고 싶다. 사람 됨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

나는 기가 약한 사람이다.

나도 고집이 있고, 나에게도 감정이 있지만 그래도 논리적이고 맞는 말을 들으면 수긍한다. 무논리로 그저 우기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나는 항상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늘 부족한 상태인 걸 아니까 누군가가 나에게 피드백을 해 주면 일단 듣고 고칠 수 있다면 고치기 위해 노력한다. 지금 같이 있는 사람이 하고 싶은 게 있고 먹고 싶은 게 있으면 그냥 따라간다. 대개 내가 혐오하는 일도 아니고, 그 사람이 즐거워 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기분이 좋으니까.

나는 자주 지는 사람이다. 누군가의 의견에 자주 휘둘리고, 누군가에게 설득당하고 내 의견을 내세우기보다 듣는 편이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지는 게 이기는 일일 때도 있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나는 얼마든지 져 줄 수 있다. 허허하고 속 없이 웃고 그냥 져 주고 말을 들어주는 건 사실 생각보다 쉽다.

하지만,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 쉽지만 항상 져 주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은 싫다. 어쩌면 나에게 남은 마지막 감정적인 고집일지도 모르는 부분은 이 부분이다.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지, 나는 네가 좋은 그게 나도 좋아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 의견이 없어서 나에게는 호오가 없어서 그저 예스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사람의 의견을 듣고, 나의 의견과 호오를 체크하고, 온갖 경우의 수에 숫자를 매겨 더한 총합을 비교한 후에 그 사람에게 '나도 네가 좋다면 좋아'라고 말하고 있다는 걸.

욕망이 선명한 사람은 좋다. 속이 투명한 사람은 대응하기 쉬워서 편하다. 누군가를 대함에 있어 머리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건 꽤 플러스요인이다. 그러나 자신의 욕망이 소중한 만큼, 상대방의 욕망도 크기와 관계없이 소중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라면, 다시 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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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의 열기가 되살아난다. 온갖 경우의 수 중 단 9%라는 극한의 가능성을 뚫고 기적같은 역전승으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이 월드컵 16강에 진출하며 온 나라가 붉게 타올랐다. 스포츠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나마저 새벽까지 뜬눈으로 지새며 무한 새로고침을 했으니 말 다 한 게 아닐까. 끝이 보이기는 한다지만 여전히 발을 붙잡는 코로나의 우울한 기운과 갑작스럽게 추워진 날씨, 조금씩 어려워지는 경기 등 우울하고 고여만 있던 분위기에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좋은 이벤트였다. 

 

그리고 그와 함께 SNS에서는 긍정적인 밈이 하나 생겼다. '이미 졌는데' '가능성이 너무 낮아' '심지어 상대는 축구강국 포르투갈' '호날두 출전한대' ... 온갖 부정적인 말들 사이에서 날카롭게 빛나는 긍정적인 밈이었다.

 

'알빠임?'

 

날은 추워지고, 한 해는 저물고, 나는 이룬 것이 없는 것 같고, 모든 용기가 시간에 빛 바래 사그라드는 연말이었다.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차곡차곡 쌓여가는 실패의 기억들을 바탕으로 나는 점점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 되어갔다. 이것이 바로 '나이 듦'이라고 생각했다. 이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일 뿐이라고 그저 슬프게 받아들이면서. 

 

그런데 문득 저렇게 일견 단순무식해 보이기까지 하는 명쾌한 밈을 보고, 어쩐지 그것이 진짜로 사실이 되어버린 것을 목격하니 너무 신기하고 신이나는 것이다. 마치 세상이 나에게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더 많이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재고 따지지 않아도 된다고 그냥 해 보아도 되는 거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렇지. 사실 확률이라는 건 많은 경우의 수를 가지고 일이 일어나기 전에 계산하는 데에 쓰는 허구의 숫자다. 아무리 높은 확률도 실제 발생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고, 아무리 낮은 확률이라도 발생한다면 그것으로 끝이다. 어차피 삶에는 0과 1밖에 없다. 확률은 그저 몸과 마음의 준비를 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보조지표일 뿐이다. 결정을 내리기 위해 가장 중요한 근거가 아니라. 

 

한 해를 마무리하는 동시에 12월은 한 해의 시작을 준비하는 달이다. 올 해를 돌이켜보면서 성과를 찾아내고, 그를 바탕으로 내년을 준비하는 달이다. 사실상의 2023년의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12월의 초반에 내년 한 해동안 마음에 품기 좋은 유행어가 생겨서 좋다. 내년에는 좋은 일이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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